[ 만남 ]
그날은 5월의 늦은 저녁이었다.
나는 마트에서 장을 본 후 구석진 화장실에서 나오고 있었다.
평소처럼 조금은 낮은 시선으로 주변 사람들을 보지 않은 채 카트를 밀며 나아갔다.
언제부터인지 정확히 기억나진 않지만 내게는 사람들의 얼굴을 쳐다보지 않는 습관이 있었다.
왠지 모르는 사람과 눈이 마주치면 서로 민망하거나 불편하다는 것이 이유였고,
사실 그보다 더 큰 이유는 내가 사람에게 별 관심이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날, 화장실에서 나와 얼마 되지 않는 걸음을 걸었을 때
나는 한 사람의 얼굴에 시선이 고정될 수밖에 없었다.
30대 후반의 그녀는 초등학생쯤 되는 남자아이와 함께 내가 있는 곳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나는 분명 평소처럼 스쳐 지나가는 풍경을 보듯 주변에 무관심한 상태였지만
뜻밖에 마주한 그 풍경이 너무도 익숙하고 그리웠던 나머지 나도 모르게 그곳을
찾아낸 모양이었다.
그녀의 모습은 세월의 변화 앞에 조금은 변해있었지만 내게는 13년 전의 모습 그대로
느껴졌다.
그녀의 이름은 이다혜. 나의 오랜 첫사랑이자, 오랜 마지막 사랑.
그녀를 처음 알게 된 건 고등학교 2학년, 반 배정을 받은 날이었다.
그 당시 나는 뚜렷한 장래 희망 따위는 없었지만, 공부는 잘해야 한다는 막연한 목표를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늘 상처럼 쉬는 시간에도 여전히 책을 보고 있었다.
아이들의 소음에 익숙해질 무렵 불현듯 어디선가 내 귀를 현혹하는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는 너무나 청아하고 발랄한 나머지, 마치 이른 아침의 새소리처럼 느껴졌다.
나는 내가 알아차리기도 전에 그 소리의 정체를 찾고 있었고 마침내 앞쪽 창가자리에
모여 수다를 떨고 있는 세 소녀에게 시선이 고정되었다.
그녀는 눈에 띄게 웃는 얼굴이 예쁜 소녀였다.
어깨까지 내려오는 단발머리에 햇살을 받아 하얀 피부가 더욱 밝게 빛나 보였다.
나는 마치 최면에 걸린 듯 그녀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아니, 최면이라면 애써 깨어나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나는 결국 책으로 다시 눈을 돌렸다.
내 시선의 파동이라도 감지했던 걸까, 그녀가 고개를 돌려 나를 보았고 결국 눈이 마주치고 만 것이었다.
그날, 나는 종일 시선을 책에 묶어 두었지만 모든 감각은 그녀에게로 향해있었다.
온통 그녀에게로.
[ 첫마디 ]
반을 배정받은 후 4개월이 지났을 무렵 나는 그녀와 첫마디를 나눌 수 있었다.
초여름의 하굣길이었고 나는 집으로 가기 위해 버스에 타고 있었다.
버스가 잠시 멈춰 승객들을 승하차시키고 다시 출발할 때 누군가가 내 옆자리에 털썩 앉았다.
여느 때처럼 나는 무심히 창밖만 볼 뿐이었다.
그런데, 반사된 유리창을 통해 옆자리의 그녀가 보였다. 다혜였다.
나는 호흡조차 할 수 없었다.
그저 미세하게 숨을 쉬며 창밖을 바라보는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그때 덜컥 그녀가 내 이름을 불렀다.
“너 이재서지?”
나는 너무 놀라 하마터면 자리에서 일어설 뻔했다.
겨우 그녀를 보는데 긴장한 나머지 고개가 녹슨 로봇처럼 삐걱거렸다.
0.1초는 되었을까, 나는 그녀와 눈이 마주치고는 다시 서둘러 시선을 피하며 말했다.
“어... 내 이름 알고 있었구나...”
그러자 그녀가 재빨리 말을 이었다.
“당연하지. 너, 나 좋아하잖아.”
나는 이번에는 그녀의 얼굴을, 그리고 눈을, 똑바로 바라볼 수 있었다.
새빨개진 얼굴로 아니라며 겨우 변명을 늘어놓자, 그녀는 다시 내게 새침하게 말했다.
“나는 너 좋은데, 아니라면 어쩔 수 없지.”
그녀는 내게서 고개를 돌렸고, 나는 그 모습을 얼이 빠진 얼굴로 바라보았다.
그러자 그녀가 다시 나를 보며 듯 피식 웃었고, 재밌다는 듯 소리를 내 웃었다.
다음 날, 내가 학교에 도착했을 때, 학교에는 이런 소문이 퍼져있었다.
‘이다혜는 이재서를 좋아한다고.’
우습게도 그 소문은 그녀가 스스로 내었다고 한다.
'생각+ > 긴 생각' 카테고리의 다른 글
논두렁 아이돌 - 2화 터질 것이 터진 거야 (4) | 2025.07.22 |
---|---|
(웹소설) 논두렁 아이돌 - 1화 드디어 찾았다 (3) | 2025.07.21 |
기억의 시작 - 4 (1) | 2025.07.06 |
기억의 시작 - 3 (1) | 2025.07.06 |
기억의 시작 - 2 (0) | 2025.07.0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