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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긴 생각

기억의 시작 - 3

by °마로° 2025. 7. 6.

[ 연락 ]


인서는 모든 것에 솔직한 편이었다.
치과의사라는 나의 직업이 마음에 들었다고 했고, 내가 연애를 많이 하지 않은 것도
마음에 들었다고 했다.
농담인지는 모르겠지만 자신은 연애를 100번도 넘게 해봐서 말 많은 남자는 실속이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고 했다. 그래서 말수가 적은 내가 더 마음에 들었다고.
그런 꾸밈없이 솔직함과 당당함들이 자꾸만 다혜를 떠오르게 만들었다.
인서는 인서만의 매력이 차고 넘치는 여자였지만 나는 오래된 익숙함에 목이
말랐던 것인지 자꾸만 인서에게서 다혜를 찾고 있었다.
그러면서 조금씩, 자꾸만 인서에게 빠져들어 갔다.

우리는 첫 만남 이후 만남의 횟수가 빠르게 늘어갔고, 어느새 매일 연락을 하고 시시콜콜한
일과를 공유하는 사이까지 발전해 갔다. 
당연히 그렇게 될 수 있었던 결정적인 이유는 적극적인 인서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하지만 그건 나 역시도 인서를 좋아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인서와의 만남이 4개월에 접어들었을 때 인서는 내게 프러포즈를 했다.
자신이 안 하면 나는 평생을 안 할 것 같다는 이유를 대면서.
그랬다. 인서는 나와 만날 때면 얼른 결혼하고 싶다는 말을 자주 내뱉었었다.
하지만 나는 그저 장난으로 생각했을 뿐, 설령 사실일지라도 이렇게 빠르게 프로포즈할 
거라곤 상상도 못 한 일이었다.
더군다나 여자가 먼저 프러포즈라니. 마음에 내키지는 않았지만 마음 깊은 곳에서는
내 인생의 비어 있던 퍼즐 하나가 꼭 맞춰지는 느낌이 들어 가슴이 뛰었다.

그날 밤 나는 인서가 준비한 반지를 손에 끼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소파에 앉아 반지 낀 손을 보며 생각에 잠겨 있을 때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걸려 왔다.
나는 전화를 받았고, 상대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심장이 내려앉았다.

“나, 할 말이 있어. 우리 한 번 만나.”

그 상대는 다혜였다.

 

 

[ 사과 ]

 

다혜의 전화를 받은 지 3일 만에 우리의 만남은 이루어졌다.
도시의 외곽에 위치한 한적한 커피숍. 

내가 도착했을 때는 이미 다혜가 먼저와 자리를 잡고 있었고, 

테이블 위에는 미리 주문한 라떼 두 잔이 놓여있었다.
젊은 날 우리는 항상 라떼를 마셨었다.

그래서 그녀가 미리 시켜뒀겠지만, 나는 그날 이후 라떼를 마시지 않았다.
우리는 가벼운 눈인사만을 하고 한동안 아무런 말이 없었다.
잔잔한 음악과 이따금 커피를 가는 기계 소리만이 적막을 덮어주었고,

결국 더 이상의 적막을 버틸 수 없어 먼저 말을 꺼낸 건 나였다.

“어떻게 지냈어?”

그녀는 말없이 미소만을 살짝 지어 보였다.
그리고 잠시 후 입을 열었다.

“나 그날, 너 봤어. 마트에서.”


나는 그저 고개를 끄덕였고, 다시 또 침묵이 이어졌다.
그렇게도 내 앞에서 재잘 거리던 그녀가 너무도 낯설게 느껴졌다.
결국 다시금 적막을 깨트린 것도 나였다.

“왜, 날 보자고 한 거야?”

이번에도 그녀는 대답이 없었다. 그저 표정 없이 한참을 내 눈만을 바라보았고,
나 역시 그녀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그녀의 눈빛이 내게 어떤 말을 전하는 것 같아 나는 온 신경을 집중해 보았지만
전혀 의미를 알 수가 없었다.
얼마가 지났을까? 닫혀있던 그녀의 입술이 살짝 벌어졌고, 겨우 움직이기 시작했다.

“재서야, 우리 술 한잔할래?”

우리는 근처 술집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녀는 자리를 잡자마자 연거푸 술잔을 비워댔다.
마치 술에 힘을 빌리기 위해서 그러는 것처럼, 비우고 또 비웠다.
나는 몇 번을 천천히 마시라며 말려보았지만, 그녀는 내 말을 듣지 않았다.
빠르게 비우는 잔만큼이나 그녀는 빠르게 취해갔고 

두 볼에는 소녀의 붉은 빛이 물들어 있었다.
마지막 잔을 비운 그녀는 결심한 듯 잔을 소리 나게 내려놓았다.

“나 많이 미웠지?”

나 또한 어렵게 입을 떼었다.

“많이 밉지. 그때도, 지금도, 앞으로도.”

그녀는 이해한다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미안해. 그땐 내가 너무 어렸어.”

나는 미안하다는 한마디에 오래된 미움과 원망의 감정들이 한순간에 

무너져 내리는 느낌이 들었다.

“다 지난 일이야. 이제 와서 무슨 의미가 있어.”

내 말에 그녀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너무 늦었어. 사과가. 그래도 지금이라도 꼭 해야 하니까. 그래서 연락한 거야.”

그녀는 한동안 고개를 숙이고는 아무 말이 없었다.
그러다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미안해 재서야. 너무, 너무 사랑했는데... 그래서... 그래야만 했어.”

 

 


어느새 그녀의 눈에서는 눈물이 흐르고 있었고,

나는 갑작스러운 상황에 어떻게 해야 될지를 몰라 허둥거렸다.

그녀는 한참을 소리 없이 흐느끼더니 더 이상 견디기 힘든 듯 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가게를 뛰쳐나갔다.
나는 그녀를 부르며 서둘러 쫓아갔지만, 그녀는 내 손을 뿌리치며 택시에 올라타고는
그렇게 점차 멀어져 갔다.

그날 밤, 나는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침대에 누워 그녀의 행동과 말들을 되새겨 보았지만 그녀의 미안하다는 말밖에 
이해되는 것이 없었다.
너무 사랑했는데 그래야만 했다니.. 

너무 사랑했는데 다른 남자를 만나고 그 남자의 아이를 가졌으며, 그 남자와 결혼을 했다?
갑자기 머리가 아파왔다.

손으로 이마를 짚는데, 이마에 차가운 감촉이 전해졌다.
반지였다. 며칠 전 인서에게 받았던.
나는 한동안 그 반지를 바라보았다.

멍하니... 그리고 꽤나 오랜 시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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