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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긴 생각

기억의 시작 - 4

by °마로° 2025. 7. 6.

 

[ 결혼 ]

 

인서에게 반지를 받은 지 5개월 만에 우리는 결혼을 했다.
결혼이라는 중대한 일을 너무 급하게 진행하는 것 같았지만

인서와 나는 오히려 서둘러 하는 결혼을 반겼다.
알다시피 인서는 결정을 내리면 머뭇거림이 없는 성격이다.
하지만 내가 이런 과감한 결정을 내리라고는 나조차도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그건 아마도 내 연약한 마음이 더 이상 흔들리지 않고 하루빨리 한 곳에 단단히
정박하기를 바래서였는지 모르겠다.

그날 다혜와 헤어진 후 나는 여러 차례 그녀에게 연락을 시도 했었다.
하지만 그녀는 내 연락을 받지 않았고 얼마 후에는 번호까지도 바뀌어있었다.
풀리지 않는 의문들이 많이 남아 있었지만 결국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나는 인정했다.
다행히도 일과 결혼 준비들로 정신없는 시간을 보내는 사이 다혜의 기억들은

조금씩 흐려져만 갔다.

그리고 결혼한 지 일 년이 되었을 때 마침내 우리는 사랑의 결실을 볼 수 있었다.
분명 나보다는 인서를 더 많이 닮은 딸이었다.
인생과 생명의 경이로움에 감탄을 한 순간이었다.

내가 결혼을 해 아이를 갖는다는 건 다혜와 이별한 후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던 일이었다.

그날 치과로 돌아와서도 내 머릿속은 온통 아이 생각뿐이었다.

그 때문에 어떤 환자들이 왔는지 기억조차 하지 못했지만,
마지막 환자만큼은 정확히 기억이 났다.

그 남자는 창모자를 눌러쓰고 거무튀튀한 얼굴에 짧은 수염이 잔뜩 난 남자였다.
그 남자는 내게 아무 말 없이 편지 하나만을 건네주고 진료실을 나갔고,
편지의 내용은 이러했다.

 


안녕, 재서야.
지금쯤 내 편지가 너에게 전달되었겠지?
나는 지금 한국에 없어. 그래서 다른 사람을 통해 편지를 보내.
그때 우리가 만났을 때 하지 못한 말들이 많아. 
그래서 수천 번을 고민하다가 편지를 써.
그때 기억나? 내가 취업한 첫 번째 회식 날.
그날 나는 아침이 돼서 집에 돌아왔고, 너는 내게 처음으로 크게 화를 냈었지.
사실... 나 그날 술을 얼마 안 마셨었어.
근데 그 자식이 무슨 짓을 한 건지 그 자식이 주는 술을 먹고는 기억이 안 났어.
그리고 내가 깨어났을 때는 이미 모든 게 잘못돼 있었어. 
나는 두려웠어. 그래서 너에게 사실을 숨기고 싶었어.
나만 조금 괴로우면, 우리 사이는 여전히 좋을 거라 위로했어.
근데, 내가 그렇게 운이 없는 여자인지 그렇게 쉽게 아이가 생긴 거야.
정말 많은 시간 고민하고 생각해 봤어.

근데 아이에게 무슨 죄가 있겠어.
그래서 나는 결국 아이를 포기할 수가 없었어.
내가 나쁜 년이 되더라도 너를 떠나 그 자식에게 가는 것이 최선이라 생각했어.
그때 내가 그랬었지? 그땐 너무 어렸었다고.
맞아. 그땐 너무 어렸어.
재서야, 나는 이 일들을 무덤까지 가져가려고 했어. 네가 아파할 걸 아니까.
근데, 이제 나도 너무 마음이 아파서 말을 하고 싶어. 미안해.
그날 전까지의 나만 기억해 줄 수는 없을까? 그냥 서로 좋았던 날들의 기억들만.
그럼 나 너무너무 행복할 것 같아.
끝으로 결혼 진심으로 축하해. 항상 네가 행복하기를 기도할게.

 

나는 편지를 읽다 그만 그 자리에 주저앉아 울고 말았다.
소리가 새어 나가 밖에서 누군가 알아볼까 소리도 없이..
이따금 가냘픈 신음소리가 새어 나왔지만 그럴 때면 나는 더 이를 악물었다.

 

 

[ 기억 ]


유난히도 맑고 화창한 날이었다.
나는 옷을 정갈하게 차려입고 다혜의 앞에 서 있었다.
한국을 떠났다던 그녀의 말은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고 나는 회고했다.
너의 생명은 다른 곳으로 떠났을지 몰라도 너의 육신은 바로 내 앞에 있으니까.

너는 참 바보 같다.
네가 사람을 써 나에 대해 알아냈듯이 나도 그럴 수 있다는 걸 너는 몰랐나 보다.

왜 너는 나를 만나고 세상을 떠났을까?
우리가 그날 우연히 마주치는 운명의 장난이 없었다면 어땠을까?

떠나간 너에 대한 안타까움과 남겨진 나의 애잔함에 눈물이 고였다.
그리고 고였던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릴 때 내 볼엔 뜨거운 느낌이 들었다.

나도 참 바보 같다.
그렇게 너를 원망하며 살아왔는데 결국 너를 닮은 사람을 만나, 너를 가슴에 품고
살아가야 한다.

 


너의 묘를 어루만지는 내 손이 너와 처음 손을 잡은 그날처럼 가늘게 떨려왔다.
뿌예진 시야 때문에 나는 아무것도 볼 수 없었지만,

그로 인해 너의 모습이 더 선명하게 떠올랐다.

너는 그 시절 그때 모습으로 창밖의 햇살을 맞으며 밝게 웃고 있었다.

 

그리고 고갤 돌려 나를 보며 웃음 지었다.


‘누군가는  
사랑의 끝이 이별이라 말하지만,

나는 안다.

진심으로 사랑한 사람은
시간이 아무리 흘러도
끝나지 않는다는 걸.

그 기억은
조용히,
아주 오래도록 우리 안에 살아 있다.

그러니 어쩌면,
이건 끝이 아니라
기억의 시작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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