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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긴 생각

기억의 시작 - 2

by °마로° 2025. 7. 5.

 

[ 연인 ]

 

마트에서 그녀와 마주친 뒤 3개월이 흘렀다.
처음 한 달 정도는 자려고 눕거나 혼자 멍하니 있다 보면 그녀의 생각이 계속해서 났다.
마트에서 보았던 모습과 그동안 어떻게 지냈을까, 아픈 곳은 없을까,
남편은 어떤 사람일까, 행복할까, 오만가지 생각이 머릿속을 가득 메웠다.
나아가 내가 그녀와 연애하던 시절의 기억까지도 떠올랐다.
그렇게 그녀의 생각에 빠져 살다 두 달이 다 되어갈 때, 나는 한 여자를 만나게 됐다.


그녀의 이름은 박인서.

나의 몇 없는 친구 중 한 명인 훈이라는 녀석을 통해서였다.
훈이는 나의 초,중,고 동창이자 나에 관한 대부분을 알고 있는 녀석이었다.
다혜를 보았다는 내 말을 듣고는 며칠 뒤 난데없이 저녁을 먹자며 약속을 잡았다.
그리고 주말이 되어, 나는 약속한 장소에 먼저 도착해 훈이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얼마 후 내 앞에 등장한 건 훈이가 아니라 처음 보는 여자였다.


“재서 씨 맞으시죠?”

 

 


나는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였고, 그녀는 자연스레 내 앞에 앉으며 말을 이었다.

“훈이가 오늘 못 온대요. 대신, 제가 나왔어요.”

인서는 그렇게 넉살 좋게 말하고는 생긋 웃었다.
나는 그날, 저녁 식사와 커피, 그녀를 집까지 바래다주는 불편의 시간을 견뎌내야만 했다.
물론 인서에게 죄송하다는 한마디를 남기고 집으로 돌아오는 방법도 있었겠지만,
나는 나를 만나기 위해 준비한 상대에게 그런 거절을 할 만한 위인은 되지 못했다.
물론 인서가 마음에 들지 않아서 불편한 것은 아니었다.
인서는 요가 강사라는 직업을 가지고 있었고, 그 때문인지 늘씬하고 아름다운 얼굴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니까 불편함의 이유는 오로지 내 마음의 문제일 뿐, 그녀와는 상관이 없는 것이었다.


나는 그날도 똑같았다. 인서의 얼굴을 제대로 보지 못했고,
그저 질문에 짧은 대답을 하는 것이 전부였다.
그런데도 인서는 계속해서 대화를 유도했고 한편으론 이런 나를 호기롭게 보는 것도 같았다.
사람의 냄새라곤 전혀 없는 내 앞에서 잘 웃고 농담도 할 수 있는 사람.
그것이 인서라는 여자였다.
인서와 식사를 마치고 커피를 마실 때, 나는 문득 예전의 기억이 떠올랐다.
고등학교 2학년 시절의 나와 다혜의 기억.

그때의 나는 지금보다 더 내성적이었고 말도 없었다.
우리는 연애를 시작했지만, 항상 그녀가 말하면 나는 작게 웃어 주는 것이 전부였다.
하지만 그녀는 절대 서두르거나 재촉하지 않았다.
천천히, 그리고 조심스럽게 나의 저주를 풀기 위해 노력했고,
결국 영원할 것 같던 나의 저주는 그녀에게 해제가 되었다.


어둠이 깔리고, 나는 인서를 집까지 바래다주었다.
나는 아파트 현관 앞에 서 있는 인서에게 말없이 꾸벅 인사만을 하였고,
그런 내게 인서는 뜻밖의 애프터를 신청했다.

“우리 또 봐요. 나, 재서 씨 마음에 들어요.”

인서는 나의 의중 따위는 중요치 않다는 듯 짧은 미소만을 남기며 집으로 들어갔다.
나는 그 자리에 그대로 서서 이 상황에 대해 한참을 생각해야만 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자꾸만 인서가 다혜와 겹쳐 보이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고,
결국 나의 마음은 인서를 한 번 더 만나고 싶다는 결론을 내렸다.

 

 

[ 이별 ]

 

스물여섯의 12.

다혜와 나는 이별했다.

이별은 급작스러웠고, 어떤 작은 낌새나 촉도 없었다.

우리는 고등학교 2학년을 시작으로 자그마치 8년의 만남을 이어갔다.

그 나이 때 누구나 할 법한 달콤한 연애를 했고, 서로가 떨어지기 싫어 대학까지

같은 곳으로 가게 되었다.

우린 서로 전공이 달랐지만, 수업 시간을 빼고는 항상 붙어 다녔다.

함께 점심을 먹고, 저녁이면 술잔을 부딪치며 서로의 꿈을 공유했다.

그리고 밤이 되면 한 이불을 덮고서 서로의 체온을 느끼며 잠드는 낭만까지 누렸었다.

물론 군대에 있던 2년간은 그 행복을 누리지 못해 힘들었지만

그녀의 편지와 면회들로 쉽지 않은 나의 군 생활을 견뎌낼 수 있었다.

 

 

 

젊음의 시간은 유난히도 빠르게 흘러갔다.

내가 4학년이 되고 그녀가 갓 취업을 시작한 무렵이었다.

12월의 몹시도 추웠던 어느 날,

그녀는 내게 헤어지자고 말했다.

얼어붙은 나의 두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다른 남자가 생겼다고.

그 남자의 아이를 가졌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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