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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긴 생각

논두렁 아이돌 - 4화 내 사전에 포기란 없다

by °마로° 2025. 7. 29.

 

 

4화. 내 사전에 포기란 없다



"....거짓말이죠? 오늘 했던 말. 다 알아요."

전화기 너머로 들려온 시환의 말에 도준이 피식 웃음을 지었다.

"너는 눈치가 너무 빨라. 모른 척 좀 해주라. 삼촌이 어떻게든 해볼 테니까."

"네. 알겠어요.... 삼촌, 너무 무리하진 마요."


"그래, 고맙다. 너도 얼른 자고. 내일 보자 시환아."

도준이 전화를 끊었다.

시환은 도준의 조카이자, 시환에겐 삼촌이었다.
사실 시환은 노래나, 춤, 외모, 어디 하나 뛰어난 점이 없었다.
삼촌인 전도준이 아니었다면 아이돌을 꿈꿔 볼 수도 없는 그저 평범하고

흔해빠진 그런 아이들 중 하나일 뿐이었다.
잘난 것이 없어 워낙 눈치를 많이 살피다 보니 그나마 눈치 하나만큼은
뛰어났다. 그래서 도준의 거짓말도 금방 알아챘을 것이다.

도준은 자신을 걱정해 주는 시환의 전화에 작게나마 위로가 되는 듯했다.
도준이 고개를 들어 가만히 밤하늘을 올려다봤다.

작은 별들이 군데군데 하늘에 떠 있었다.
별을 바라보던 도준이 크게 심호흡을 한 번 했다.

"유나야, 잘 있니? ....보고싶다."

그리움에 사무친 얼굴로 도준이 읊조렸다.
그리고 오랫동안, 그곳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다음 날. 이른 아침부터 서진이 집을 나왔다.
운동복 반바지에 모자를 눌러쓴 서진은 하얗고 가느다란 다리 때문에 겨우
여자아이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서진이 아파트 현관 밖으로 나오자, 도준이 마중 나와 기다리고 있었다.

"서진아 안녕? 아침부터 어딜 가니? 야~ 오늘따라 너무 예쁘다."

'!!' 능청스레 웃으며 인사하는 도준을 본 서진이 놀라 멈춰 섰다.

"........"

시선을 피한 채 말이 없던 서진이 결국 인사도 없이 도준의 옆을 지나쳐 갔다.

"운동 가는 거야? 아저씨도 운동 가려고 하는데. 우리 같이 걸을까?"

얼른 옆에 따라붙은 도준이 말을 이었다.
그러자 서진은 불편하다는 표정을 짓곤 도준을 무시한 채 달리기 시작했다.

"오늘 날씨 좋다. 매일 뛰니? 역시 날씬한 이유가 있었구나. 하하하"

어느새 달려 온 도준이 다시 쓸데없는 소리를 시작하자,

결국 참지 못한 서진이 달리기를 멈췄다.

"안 한다고 그랬잖아요! 왜 자꾸 그래요 나한테!"

서진이 화난 얼굴로 버럭 소리를 질렀다.

"이야 너 발성 좋구나? 복식호흡 하니?"

"아 정말!!!"

능글맞게 장난치는 도준을 더는 상대하기 싫다는 듯 서진이 더 크게 소릴 질렀다.

"아,알았어..."

한풀 꺾인 도준을 한껏 째려보곤 서진이 다시 앞으로 달려갔다.

'그런다고 내가 포기할 것 같으냐.'

 

멀어지는 서진을 바라보며 도준이 속으로 생각했다.

 


잠시 후, 서진이 가볍게 뛰며 러닝을 마치고 아파트 현관으로 향했다.
현관에 서진이 들어서자, 그곳에 숨어 있던 도준이 수건과 생수를 들고 깜짝 등장했다. 
갑자기 나타난 도준으로 인해 너무 놀란 나머지 서진이 그 자리에 그대로 얼어버렸다.

"아유, 이 땀 봐. 이것 좀 마셔 얼른."

수건으로 서진의 이마에 묻은 땀을 삭삭 닦음과 동시에 이미 뚜껑을 따놓은 생수를 
서진의 손에 쥐 켰다.

'하아.... 정말 미치겠네....'

서진이 두 눈을 꾹 감으며 조용히 화를 눌렀다.

"아저씨."

"응?"

"도대체 이러는 이유가 뭐예요? 솔직하게 말해봐요. 아이돌 말고 다른 이유가 있는 거죠?
혹시 저 좋아해요?"

그 말에 도준의 눈과 입이 쩍 벌어졌다.

"내, 내가 널 왜 좋아해. 그럼 안 돼, 큰일 나. 그리고 넌 내 스타일이 아니야."

'니네 엄마라면 모를까...'

내 스타일도 아니란 말에 안 그래도 커다란 눈으로 서진이 더욱 쏘아보았다.

"서진아, 정말 니가 필요해서 그래. 아저씨가 정말 부탁할게. 한 번만, 한 번만 우리 
팀이라도 만나 보고, 그때 니가 판단해. 그러면 내가 다시는 너 귀찮게 안 할게.
응? 약속!"

"..........."

새끼손가락까지 펴고 간절해하는 도준을 서진이 가만히 바라봤다. 그리고 생각했다.

 

어차피 계속 쫓아다니겠지? 후.... 그래 한 번 만나주자. 그리고 안 한다고 하면 되니까.
그래도 다시 귀찮게 하면 정말 경찰에 신고해 버리자.

그렇게 생각했지만 사실 가장 큰 이유는 도준이 짠하고 불쌍해 보여서였다.
다 큰 어른이 자신 같은 아이에게 자꾸만 굽실대는 것이 서진은 못내 마음에 걸렸다.

서진이 손에 쥔 생수를 들어 벌컥벌컥 마셨다.

"약속, 꼭 지키세요."

서진이 단호한 눈빛으로 말을 내뱉고는 몸을 틀어 엘리베이터로 걸음을 옮겼다.
그러자 '예쓰!' 하며 일단 한시름 놓았단 생각에 도준이 두 주먹을 꽉 쥐며 작게 소리쳤다.


그날 저녁. 도준이 양손에 치킨이 담긴 봉다리를 가득 들고서 안무실로 들어갔다.
열악한 환경의 안무실은 천장이 낮고 작은 에어컨 한 대와 벽에 붙은 거울, 그리고
어디 중고로 사 온 것 같은 오래된 오디오가 전부였다.
그런 환경과는 무관하게 시환이 땀에 흠뻑 젖은 채 쿵짝거리는 노래 비트에 맞춰
안무 연습을 하고 있었다.
자신이 왔는지도 모르고 연습 중인 시환을 도준이 흐뭇하게 잠시 바라보다가
오디오를 껐다.
그제야 도준이 온 것을 확인하곤 시환이 미소를 지으며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대표님 오셨어요?"

"어, 그래. 애들은?"

도준이 사 들고 온 치킨을 바닥에 내려놓으며 말했다.

"오늘 주말이잖아요."

'아....' 그제야 도준은 주말임을 알아차린 얼굴이었다.
그리고 콜라를 꺼내다가 문뜩 궁금해졌다.

"너는 주말인데 왜 나와서 땀을 그렇게나 흘리고 있냐?"

"집에서 놀면 뭐 해요. 조금이라도 연습해야죠."

도준이 콜라를 종이컵에 부어 시환에게 건넸다. 그리고 기특하단 듯 시환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너 잘하고 있어. 그러니까 너무 조바심 갖지 마."

시환이 대답 대신 작게 미소를 짓곤 콜라를 마셨다.

시환은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다. 자신이 이 팀에서 가장 볼품이 없는 존재라는 것을.
그래서 누구보다 더 열심히 노력해야 한다는 것을.

 

다만, 누구에게나 한계는 존재한다.

그리고 그 한계를 깨는 것이란 사실상 불가능에 가깝다.

그 사실 또한 시환은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