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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긴 생각

(웹소설) 논두렁 아이돌 - 9화 마음을 열어 봐

by °마로° 2025. 8. 7.

 

 

9화. 마음을 열어 봐



정말 느닷없었다. 서진의 아빠가 사라진 일은.
그는 그날도 이른 아침인 6시에 일터로 가기 위해 집을 나섰었다.
간단히 세수와 머리를 감고, 가영이 차린 별것 없는 조촐한 아침밥을 먹고, 
매일 입던 낡은 작업복을 입고는 집을 나갔다.
그렇게 평소와 똑같이 집을 나간 그는 그날 이후 돌아오지 않았다.
평소 그는 외박을 하지 않았음에도 연락이 되지 않자, 가영은 단순히
동료나 친구들과 술을 먹다 잠들었을 거라 생각했었다.
하지만 다음 날도 연락이 되지 않았을 때 가영은 부랴부랴 인력사무소를 찾아갔다.
그리고 전날 남편이 일을 하러 오지 않았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그날부터 가영은 여기저기를 수소문하고 경찰에 실종신고도 해보았지만 모두 헛수고에 
불과할 뿐이었다.
그들에겐 어떠한 문제도 있지 않았다. 

그저 어느 부부에게나 있을 법한 작은 부부싸움은 있었어도 남편이 집을 나갈만한 

큰 문제는 존재하지 않았었다.
가영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가난은 했어도 서로 악착같이 열심히 살았다.
원룸을 벗어나 빌라로 이사를 하며 이제 우리도 잘살아 보자고 했었다.
그런데 한해도 지나지 않아 이렇게 자신과 딸을 남겨두고 남편이 사라졌다니...
결국 2년이라는 시간이 지났을 때, 가영은 남편의 실종을 도망이라는 표현으로 대신했다.
그것은 가정을 버리고 사라진 무책임한 남편에 대한 일종의 원망이었다.

 


아빠의 실종은 서진에게도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
처음 한 달간은 가영이 사실을 말하지 않았다.
그래서 서진은 다른 지역에 아빠가 일을 하러 간 줄로만 알고 있었다.
하지만 한 달이 지나가고 그동안 가영의 표정만 보아도 아빠에게 어떤 일이 생겼구나 하고
느낄 수 있었다.
9살 꼬마에게 아빠의 부재는 크게 다가왔다. 

잘 웃던 아이가 어느 순간부터 웃음을 잃었고,
재잘대며 떠들던 아이의 말수가 줄어들었다.

그렇게 서진은 서서히 마음의 문을 걸어 잠그기 시작했다.

그런 서진이 유일하게 큰 소리를 내던 것은 노래를 부를 때뿐이었다.
아마도 자신 내면의 아픔과 상처들을 노래로 나타내려 했을 것이다.
그것이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아빠를 웃게 해주고 싶어 불렀던 노래가 어느새 자신을 위로하기 위해 쓰여졌다.

 


"....왜 그렇게 생각해?"

말 못 할 사정이 있었을 거란 서진의 말에 가영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냥.... 아빠는 그럴 사람이 아니니까. 우리를 버리고 도망갈 사람이 아니니까."

"........."

서진이 이런 말을 한 적은 처음이었다. 그래서 가영은 가슴에서 뭔가가 더욱 시큰거렸다.

"......많이 컸네 우리 딸."

눈가가 촉촉해진 가영이 서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하지만 그런 작은 스킨쉽에도 어색한지 서진은 나무토막처럼 그저 
뻣뻣하게 굳어 가영의 손길을 느꼈다.


다음 날 저녁. 연습실에 온 도준이 멤버들을 불러 모았다.
음악이 꺼지고, 안무 연습을 하던 멤버들이 하나둘 소파로 모여 앉자, 도준이 입을 열었다.

"서진이가 내일부터 회사로 나올 건데, 너희 생각은 어때? 궁금하거나 할 말들 있으면

다들 해봐."

"....뭐 저는 좋아요. 실력도 있고. 생긴 것도 괜찮고."

찬수가 먼저 말을 꺼내곤 다른 사람은 어떤지 그들의 얼굴을 확인했다.
그러자 동의한다는 듯 대부분 고개를 살짝씩 끄덕였다.

"나도 좋아. 근데 춤을 못 봐서 좀 그렇네. 만약에 끔찍한 몸치면? 그건 가르쳐도 답도 없어."

'흠....' 지원의 말에 그것도 문제라는 듯 서로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그건 차차 확인해 보기로 하고, 모두 괜찮다는 거지?"

"네."

도준의 물음에 모두가 긍정의 한목소리를 냈다.
그리고 여기서 한 가지 더 말을 하고 싶어 마른 입술에 침을 발랐지만 차마 도준의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바로 서진의 성별에 대한 것과 남자로 속이고 활동을 해야 한다는 것을.
말을 해야 하지만 사실을 말한다면 어떤 일이 펼쳐질지는 이미 선명했다.
제일 먼저 지원이 때려치울 거라며 기름을 부을 것이고 그러면 너도나도 말이 안 된다며
불이 붙일 것이 뻔했다.
결국 더 이상 도준의 말이 없자 멤버들이 하나둘 소파에서 일어나 안무 연습을 하러
자리를 떴다.

"그.... 만약에.... 아니다. 하하...."

자리를 뜨는 멤버들에게 도준이 용기 내서 힘겹게 말을 꺼내 봤지만
결국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리고 속으로 생각했다. 어쩔 수 없다고. 당분간은 어쩔 수 없다고.
다시 열정적으로 안무 연습을 하는 그들을 보면서 도준은 깊게 숨을 들이켰다.


그날 밤 아파트 놀이터. 끼익-끼익 소리를 내며 녹슨 그네가 움직였다.
희미한 가로등 불빛으로 인해 가까이 보아야 서진인 것을 알아차릴 정도였다.
서진은 가만히 앉은 것도 타는 것도 아니게 그네에 앉아 나지막이 노래를 불렀다.

멀어져가는 그 뒷모습을 바라보면서 난 아직도 이 순간을 이별이라 하지 않겠네
달콤했었지 그 수많았던 추억 속에서 흠뻑 젖은 두 마음을 우리 어떻게 잊을까

....................
그러나 그 시절에 너를 또 만나서 사랑할 수 있을까
흐르는 그 세월에 나는 또 얼마나 많은 눈물을 흘리려나

나미의 슬픈 이별. 이 곡은 서진의 아빠가 좋아하고 즐겨 부르던 노래였다.
어릴 때는 가사의 의미를 모르고 따라 불렀었지만 이제는 제법 가사의
의미를 알 수 있는 나이가 되어 있었다.
서진은 아빠의 실종 이후 아빠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지만
이상하게도 오늘 엄마와 아빠의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그 이유 때문인지 서진은 오늘따라 아빠가 더 그리워졌다.

서진이 노래를 마치자 마치 노래가 끝나길 기다렸다는 듯 발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발소리가 점점 가까워지다 옆의 그네에 누군가가 앉았다.
서진이 고개를 돌려 옆을 보자 찬수였다.

“나미, 슬픈 이별. 맞지?”

“....응.”

찬수의 말에 대답은 했지만 서진은 찬수가 왜 여기에 있는지 의아했다.

“아... 나 집이 이 근처야. 대표님 만나러 왔다가 우연히.”

서진이 직접 묻지는 않았지만 이미 표정을 읽은 찬수가 자신이 이곳에 있는 이유를 
말해주었다.
그러자 서진이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아, 그리고 너 춤. 내일부터 내가 가르칠 거야. 내가 안무 담당이거든.”

말을 마친 찬수가 살짝 미소를 지었다.
처음이었다. 딱딱한 표정만을 짓고 있던 그에게서 다른 표정을 본 것은.